Saturday, November 1, 2014

Biutiful한 슬픔


해외에 있는 관계상, 개봉한지도 한참 지난 영화한편을 뒤늦게 보았다.
영화 한편이 거의 일년만에 글을 쓰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힘이다. 먼저 감독과 편집자, 배우한테 경의를 표한다.

눈물도 조금 머금었다. 성인나이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코카인을 흡인하며, 죽어간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나 고독해보여서이다. 고독이라는 것이 나한테 그렇게 슬픈것이었을까. 고독을 모르고 산지 꽤 되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 고독은 좀 달랐다. 죽음 앞에 홀로 선 인간의 고독. 잔인한 현실속에서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만이 비로서 알수 있는 고독이니까 나같은 쁘띠 브르조와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그 고독은 스산하고 공허한 겨울같다.

산다는 것이 그지같고, 매일매일이 고루하거나 혹은 쪼자나게 더러운. 그런 삶이 사실 대다수다. 불운의 아이콘처럼 계속 안좋은 일들이 터지고,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보겠다고 세상에 비비적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우리의 이웃들이다. 영화는 우울할 정도로 계속 이 이야기를 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죽은 후, 눈 쌓인 자작나무 장면은 청량하다 못해 해방이다. 비루한 삶에서의 탈출자체가 천국이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평안한 마음이 든다. 세상사 고통이 결국은 지나가는 찰나의 것으로 느껴진다. 고통,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이 말만큼 희망적인 말이 또 있을까. 아... 운명을 개척하며 아웅바둥 살기보다는 관조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기껏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삶은, 결국 죽어서 올빼미가 토해내는 털뭉치나, 다른 짐승의 사체의 일부같은. 아무 의미없는 것들로 유산을 남긴다. 내가 오늘 쓰는 이 글은  일년만에 쓴 글이긴 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나만의 의미없는 유희. 또 그럼 어때. 개의치 않는다.
오늘 잠깐 느낀 슬픔과  지금 마시는 약간의 알콜, 니코틴이면 족하다.

Thursday, July 3, 2014

고양이가 무릎 위에서 낮잠자는 시간

나는 항상 일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다. 밥을 먹거나, 똥을 싸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한다던가 잠시라도 멍하니 있는 적은 사실 드물다.

요즘 내가 유일하게 잠시 숨돌리는 시간, 혹은 멍때리는 시간은 고양이가 내 몸위로 올라와 잠을 잘때이다. 잠을 깨우지 않기위해 잠시 하던것을 멈추고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길면 한시간 반 짧으면 십여분 동안, 나도 고양이 처럼 아무 할일없이 가만히 앉아있는다.

그런생각이 든다. 인생은 사실 아주 단순하게 살아갈수 있노라고. 고양이처럼 먹다 자고, 그루밍하다가 멍때리고 그리고 다시 잔다. 그리고 그런 고양이 덕분에 나도 하루중에 아주 단순한, 그리고 조용한 시간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고양이의 침대가 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