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31, 2011

Feliz Año Nuevo & S Novim Godom



Borsh & Ensalada Rusa

Pel'menis

Chickin Kive

                                                El restaurante Rusia en Playas de Tijuana


2012년을 맞기위한 이벤트로 러시아음식점에서 2011년 마지막 석양을 보며 만찬을 즐기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개가 너무 끼어서 석양은 물건너갔고 다만 러시아전통가정식요리를 실컷 음미하였다. 멕시코의 띠후아나에서 이주해온 러시아인의 요리를 맛보며 한해를 보내는 것도 꽤나 독특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2012년은 그렇게 다중적이고 이질적인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겠지. 그리고 그 다양한 것들의 혼재 속에서 나에게 아주 익숙한 윤호가 같이 있었다.







La fiesta de ano nuevo a la familia mexicana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으려니까 집주인이 신년맞이파티를 초대하였다. 지난번 크리스마스파티에 이어서 두번째 초대다. 아들래미와 며느리, 손녀, 그리고 두딸들과 아내와 단촐하게 여는 파티에는 돼지고기와 단과일샐러드, 그리고 각각 한해를 상징하는 12개의 포도알이 차려있었다. 인류학을 사랑하는 집주인은, 여전히 인간문화의 근본은 사랑이라고 외치며 취한김에 철학적인 주제를 계속 질문했고 나중에는 결국 아내와 길게 포옹함으로서 몸소 사랑을 표현해주셨다. 그리고  불꽃놀이. 소박하고 아날로그한 이 작은 놀이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결국 2011년 마지막시간은 가장 멕시코다운 이벤트로 마무리되었고, 이제 2012년이 되었다. 내 튼튼한 이 두 다리로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다녀야할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다. 윤호가 건강하라고 덕담을 했다. 그래, 건강만하다면 모든것을 해 낼수 있는 365일의 긴 시간이 펼쳐진것이다. 마야 달력대로라면 올해는 355일이 될수도 있다만. 이래저래 재미있는 한해가 될것 같다.



Monday, December 5, 2011

Just a Perfect Day




그런 날이 있다. 모든지 순조롭게 풀리는 날. 인생에 몇 안되는 귀중한 날. 그렇지만 그렇게 인상깊은 사건은 없었으므로 곧 잊혀질것만 같은 그런 날.
오늘은 그런 날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작년에 멕시코에 도착하고 거의 1년 동안 이런 완벽한 날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거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날이란 내가 짠 스케줄대로 그대로 들어맞고,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거기다 보너스로 새로운 것까지 보고배우는, 그런 날이다. 오늘은 정말 그런 날이었다.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시간표를 기록하겠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오늘은 내 의지가 썰매를 타고, 우연한 행운이 선물로 주어진 그런 날! 아... 은유가 전혀 멋지지 않다는 것이 오늘의 유일한 오점이군...

 8:40am 기상. 오줌싸고 침대에서 꿈지락 거림.
 9:30am 드디어 일어나 담배를 한대피고 똥을 반정도 쌈. 설겆이를 하고 커피와 토스트, 브로콜리와 토마토, 계란후라이 안 터트린 걸로 하나, 어제 먹다남은 케잌조각도 조금.
10:30am  나가수 다운받은 걸로 보면서 아침을 먹다가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함.
11:00am 오늘 해야될 일을 적고, 스페인어로 번역.
12:00am 집에서 출발.
12:40am 하비에르여형제가 운영하는 치과에 도착, 이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인 350페소로 스켈링 낙찰. 드라마를 보면서 진료를 기다림.
14:00pm 스켈링마침, 치아미백에 좋은 가글제품도 추천받음. 드디어 일년치 이빨에 껴있었던 니코틴 제거.
14:20 Pm SEARS에서 화장실가고 스켈링 후 첫 담배한대. 바로 물로 가글하는 성실함을 보임.
14:30pm 국경의 터미날에서 LA가는 버스왕복권예약. 예상보다 저렴한 25달러. 기타 여러가지정보를 모두 조사, 완벽기록.
15:00pm CECUT에 가서 12 문화행사달력얻음. 내 지정석에서 또 담배한대.
15:20pm 여행사에서 D.F가는 비행기표 가격과 수하물제한 조사.
15:30pm Comercial Mexicana에서 돼지다리햄 9조각과 토마토 2개, LA여행에서 먹을 쵸콜렛과 식이섬유바 구입. 바로 햄 한조각 씹어먹으면서 리오데띠후아나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함.
16:00pm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함.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치카나를 친절하게 도와준 답례로 쵸콜렛땅콩쿠키를 선물받아 먹음. 너무 달았지만 맛있다고 미소를 날림. 선교하는 아저씨의 아구스틱 음정이탈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향함. 오늘만 세번째로 들은 버스안 노래였음.
16:40pm 모르는 낯선 집근처 정류장에 내림. 그러나 곧 새로운 멋진 장소 발견, 이 지역 문화허브인것 같음. 이름은 la casa de cultura de playas tijuana. 그곳의 친절한 직원에게 문화행사프린트물 등을 받음.
17:00pm 바다의 석양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함. 포로모션으로 싸게 산 던힐블랑코를 피우며 기분좋게 집에 도착.

Sunday, December 4, 2011

The life history of Havier Reys Escam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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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Él nació 13 de septiembre de 1950 por tercero en 13 hermanos. tiene 61 años. Nació  en el hospital jeneral de Tijuana de B.C. Actualmente hoy es el campo de deportivoclub campestre de Tijuana. Sus padres vinieron de Durango de Sinaloja. Cuando ellos estaban caminando a Tijuana, él estaba en el dentro de su madre. Su padre es Agustin Reyes Rodrigues nació en el Cantti Sinaloa el Mineral donde era la mina de oro. Él trbajó sobre el oro, plata, cobre, bronce para cargaba separar los metales.  Él estudiaba algo de quimico y un minero. Su madre trbajaba en el campo. Ella nació en Tepeguanes de Durango. iba colectaba oro para separarlo.Su abuelo era el jefe de los trbajadores de la mina. Su madre se casó muy joven como 13 años de edad, cuando su padre tenia 21 0 21 años de edad.
 Ellos emigraron a Tijuana porque se cabo los mineral en el año 1950. En el año 1921, 30, 45 había muchos oros en alla , se mataban entre ellos. Por eso su abuelo decidió emigrar por aquí. El vino a Tijuana para examinar el lugar antes de emigrar.  Esta epoca en el Rio de Tijuana había bastante agua. Por eso, el abuelo pensaba que Tijuana tenía muchos progresos y decidió cambiar la vida. Despues llegaron en Tijuana, justo Havier  nació, vivía en la Colonia Alta Mira. Su padre trabajó agricultura en San isidro tambien  trabajó por carpintero. En aquellos tiempos, los ranchos había riqueza, pero no tenía las cultura como educacion.    
  Vinieron toda la familia que sus tios y la familia de su esposato da familia trabajaban en Tijuana.  Este epoca era calle muy pequeña entre Mecicali y Tecate desde otrolugar. Por eso ellos veniaron por un caro o el camino. Despues de venir su familia, el nació en el hospital jeneral, Campesta del Tijuana que luego se cambió frente y zona río. Cuando ellos llegaron a Tijuana, no existía nada. por ejemplo, Playas de Tijuana no había el camino, fue llamado 'Francisco Villa'. Había muchos animales como el conejo, el robo, el coyote y el zoro, tambien tenía el brote del agua y el cerro. A cercada de Playas de Tijuana había Mision del sol en el dentro de los ranchos.

2. 두번째 인터뷰
어린시절 조금 힘들었음. camion altamira-> 지금 센뜨로
5번째 로 태어남. 3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3명이 죽었음, 9명이 남음
1955년 걸어서 초등학교감 일도 병행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
5학년까지 인터뷰
maestria cuca martiz' muy corajudo
-인터뷰 중간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에 대해 이야기하면 25년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기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 누군지 구분이 간다고 언급, 그들의  actitud을 보면 판단이 된다고... 띠후아나보다 멕시코가 더 위험하다고 봄.
Escuela Alverodragon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였던 이곳. 이 건물은 1929년에 만들어져서 2차 세계대전 때 본부로 사용됨.
- 한때 그는 멕시코음식점에서 일하기도. 그의 아버지가 식당을 운영, 그가 도와줌.  이 기억도 그의 젊은 시절의 한 기억임.
2학년때 maestor Ramez는 그가 좋은 상업가가 될것이라고 말함. 1959년. 3학년때 선생은 엄해서 숙제를 안해오면 가죽회초리로 벌을 주기도. 1950년대 부터 70년대까지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dogmático . regañaban mucho. 1959년도에는 여학생과 남학생은 따로 공부. 1960년대에 가서야 habia salon mixtos. 5학년때 선생이 아주 훌륭한 교육을 했다고 기억. 1963년 그는 공부하면서 요리보조, barrendero, 야채파는 사람 등등 으로 일했음, 그의 집은 무척하난했지만 이렇게 일하면서 그는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superación


La niñez de Havier fue dura. Su familia vivieron un cerro que era ultima parte de Ciudad Tijuana, se llamaba Camion  Alta Mira, ahora es el centro que emizo carretera año 1955, hoy se llama calle segudo. Ya que vivieron un cerro y poco a poco costuryendo lo que una casa.
El es quinto hijo mientras 12 hermanos. Su dos hermanos murio cuando era niño y otro morio despues. Por eso actualmente son nueve hermanos.
En su escuela primaria fue duro, porque tenia que trabajar con estudiar. Ademas cuando el tenia 7,8 año, su piedra no fucionaba porque tenia enfermedad, se llama poliomielitis neomatica. Su madre cargaba al hospital en el centro, un dia, en ano 1957, setiembre, su mama lo llevó a un hierbero en la calle primera que esta entre Revolucion y Costunaccion. Ese hierbero le dio un te muy amargo. El tomó y le lo empezó a sentir dolor a sus pierna despues ya no sentiro dolor. El pudo jugar basebol en colonia  Alta Mira, calle londores no.329 (hoy 1176).
 En mismo ano el inscribio la primaria, el recordó ese momento "Creo que no queria ir, porque no tenía zapatos, no traía cuaderno, no traía rapiz, no traía nada. y maestria me pregutó que pasale, sientate esa mesa abajo. yo llorando, me senté, me daba verguenza que miraba sin zapatos, sin cuaderno, sin rapiz, nada. y no entendí las palabras, los numeros, nada. y poco a poco me dijo maestria que quieres estudiar tu tienes que relacionar escuela antes 7 de la manana."
 El y su amigo trabajaban algo que vender cuando estudieron en primera. Este momento el conocio a muchas gente y concepto mercado. su escuela primaria se llamaba Alvarodragon que ubicaba del la colonia  Alta Mira. Este edificio fue construyido 1929 por norte amercano. Desde ano1939 hasta ano 1945, aqui fue un cuartel general de la gerra segudo mundial. Hubo los aviones, radio para comunicar todo parte de Latin america. El ano 1958, entro segudo ano, fue profesor Ramires. El le dijo que tu vas a ser buen comerciante. Cuando entrado a tercer ano, el recordo el profesor era muy estricto. Este epoca, el educacion era muy dogmático a 1970 de 1950. Hasta ano 1960, mujer y hombre estudiaban separadamente.



3. 세번째 인터뷰 15. dec.2011

5학년때 부터 인터뷰 시작.  base ball 많이 쳤던 기억.
1962~3년 6학년 시작. 아주 엄격한 선생. 계산, 수학가르침. 춤, 스포츠 가르침.
8.5점 받었던 기억.  중학교는 상업학교 들어가길 원함. segudaria는 escuela tecnica industrialico  marcial no.24에 들어감. 설계, 지리, 생물학, 수학, 상업 등등을 공부함. 영어도 공부. 1학년떄는 오전반, 2학년떄는 오후반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일함.


1977. 병원에서 일함. 1978년 첫사랑.
병원일을 바꿔 ueuetoca에서 바꿔 일함, 사막 기후가 아주 더운 지역에서 일함.
1979~1980 15일에 1,000페소의 주급을 받음. 그는 administración de hospital에서 일했는데

4. 네번째 인터뷰 21 dec.2011
1980년 escuela salud publica 에서 일함. hospital su pango?
월급이 너무 적어서 1025pesos 15일에.
jun.1980 띠후아나에 와서 스피링발리, 샌디에고에서 수와밋시장에서 3개월일함.
그후 av.revolucion일함. 이때는 상인에 대해 잘 몰랐음. 여러 언어들을 공부. 러시아어를 제외한 프랑스어, 일본어, 영어 등을 공부.
1985년까지 일하다고 85년에 자기사업벌임. 그전에 av.revolucion 3, 4사이에 상가에서 일함.
6,7에서도 일함, 5개의 상점을 가지고 있는 큰 체인점?


5. 5번쨰 인터뷰 30 dec, 2011
1985년 신발가게 시작. 
1987.8,9 년 많은 관광객이 있었음. 90,91 더 많은 상점과 햄버거식당에 가짐. 92까지 광관객들 여전히 많음.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92~99 가게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 8~9개의 개인사업들을 가지고 있었음. av revo에 98~2000년 festival mexicano가 시작됨.
1999년부터 점점 경제위기가 시작됨, 정치에 대한 비판. 2001년 투우가 멈춰지고, 위기가 본격적이됨.2001~6년 행정부, 건축부등에서 jorge 부패가 심함.
2005,6,7 jorege ramon시장president municipal2007~2010이 아주 나빴다고... 경찰부패, 행정부 부패.
인터넷이 생기고 정보가 교환되면서 좀 상황나짐? 이 시장이 마피아와 관련되었다고 추측.
2007,9 1500~2000페소 한달에 렌탈. 4개 가게  가짐. 그러나 이 시기 관광객들 거의 없어. 미디어에 띠후아나가 위험하다고 소개되면서. 사실 그 시기에 위험. tanta corrucion. 2010년에는 엔세나다, 로사리또로 관광객들이 넘어감. av revo상점이 많았을때는 5,000여개가 있었는데  경기가 않좋아지면서 이 당시 30개상점들이 남아...,

6번째 인터뷰
SUPANGO는 병원일을 할때 일했던 지역이름.
멕시코지진이후 띠후아나로 이주한 사람들이 경제발전에 기여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 실제로 다른 지역에서 가난하고 불량한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와 오히려 치안만 나빠졌다고 봄.
정치에 관한 생각: 전직시장이였던 jorge hanron(PRI), jorege ramon(PAN) 그리고 현시장인 carlos bustamente(PRI)
띠후아나는 예전에는 PRI지지가 많았았다가 PAN지지율이 높아짐. 그러나 지금은 번갈아 가며...
 됨. 1938~1989-> PRI 1989~2009-> PAN 2009~2012 PRI
2012년 7월 4일대통령선거 멕시코, 하비에르는  prd를 지지하고 이 정당이 현재 가장 영향력있다고 봄. 사회주의comunismo정당이라 사람들이 들어내고 지지하지는 않지만, 다들 속으로 변화를 원한다고. PRD는 PRI의 한 갈래라고 함.정당들이 다 문제가 있지만 그나마 PRD덜 하다고 봄.
1990년대 삶에 대한 이야기.
2012년 바하깔리포니아 모든 세금impuesto등이 올라
1995년 Av. REVO에 큰 축제에 대한 추억, 1995년 결혼,  신혼여행으로 깐꾼, 치첸잇사으로 일주일간 휴가.  아내가 자기를 발견했다고 농담. 가족끼리 오랫동안 아는 사이였다고. 1997년 첫아들 얻음.  둘째 아이는 1998년 두번째 아들 얻음. 아내가 Luci가 아내가 간질이 있어서 더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됨.
1990년대 중반 경찰의 부정부패. 마약판매상 설쳐. 경찰이 밤에 가게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기도. 큰 폭력이 바하깔리포니아에 만연, 이때 관광객들이 점점 줄어들어.  이 시기에 차로 국경을 넘으려면 미국이 마약범죄의 경계태세때문에 5~6시간이 걸려. 2000년대에  Av. REVO는 문을 닫는 가게들이 속출. 이미 버스정류장은 문을 닫은 채였고, 시주도의 행사나 서커스도 사라짐.
FAN정당이 훨씬 나쁘다고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