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5, 2012

El Santo Juan Soldado en Tijuana




 Juan Castillo Morales, ( - 1938) known by many as Juan Soldado (Juan the Soldier), was a convicted rapist and murderer who later became a folk saint to many in northwestern Mexico and in the southwestern United States. A private in the Mexican army, Castillo was executed on February 17, 1938 for the rape and murder of Olga Camacho Martínez, an eight-year-old girl from Tijuana, Baja California. His adherents believe that he was falsely accused of the crime and have appealed to his spirit for help in matters of health, criminal problems, family matters, crossing the U.S.-Mexico border and other challenges of daily life.
 Shortly after his execution the story began circulating that he was innocent and had been framed by a superior officer who was guilty of the crime. Residents began reporting strange events associated with Juan Soldado's gravesite shortly after his death, including blood seeping from his grave and ghostly voices. Others began leaving stones at his tomb, attributing miraculous occurrences to them.
In the old Puerta Blanca cemetery there are now small chapels dedicated to Juan Soldado. The first one is the edge of the pantheon where he died. The second chapel is for all to enter and is where it says he is buried; both chapels are regularly visited and prayed at by people who have problems crossing the border into the United States or who are involved in the trafficking of people in the borderland. Devotees have also claimed that he has interceded for them in other areas, such as health and family problems.
Other shrines to Juan Soldado can be found elsewhere throughout the region, while votive candles, ex voto cards and other religious items devoted to him are sold throughout northwestern Mexico and the areas of California and Arizona where immigrants passing through the region have established communities. Similar cults have arisen around the gravesites of other victims of injustice who met a violent death and who are believed to have the power to intercede on behalf of those who pray for them.
Juan Soldado's cult reflects, in some ways, the unsettled community that Tijuana was and is. The Catholic Church had no well-established local saints in the Tijuana region and was itself compromised in the eyes of many by its association with the powerful interests against whom the Mexican Revolution had been fought. Juan Soldado, a humble, nearly anonymous emigrant from the countryside who was allegedly wrongly accused by the authorities, was a fitting symbol of the upheavals that the people of that era and region confront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aturday, March 3, 2012

한인회장 인터뷰


띠후아나 이주 한인 2세대이자, 대한민국정부하 이민 1세대.
Playas de Tijuana의 StarBucks에서 약 한시간 반 정도의 첫인터뷰.

-인터뷰 내용
-성장과 가족: 1944년 8월 23일 만주 자모수에서 출생. 부모님은 함경북도 북청의 상인출신으로 4형제중 셋째로 태어남.
-한 개인으로서의 이주정착 과정: 해방후 북한으로 왔다가 45년 서울로 남하,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가 유년시절보냄. 초등학교이후 서울로 다시 상경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에 입학. 1972년 26세때 멕시코친구의 추천으로 멕시코로 유학, San Luis Ptosi에서 중남미지역연구로 수학. 6개월후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UNAM에서 유학생활하며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1974년 띠후아나로 취업이주. 당시 재미교포였던 송순식(1920)의 사업을 도와 공장관리인으로 취업. 1970년대 띠후아나는 자유무역지대로서 관세의 혜택이 있었음. 당시 송씨도 이러한 국경지대의 잇점을 이용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포목수출업(태권도복원단)을 함. 그곳에서 1년간 일하다 1975년 결혼하여 친구와 함께 가전제품소매상사업을 함. 70년대 중반 멕시코경제는 가히 버블경제라 일컬을 만큼 경기가 좋았음. 특히 통관의 잇점을 활용한 경제활동 활발.  밀수입(띠후아나-멕시코시티)그 당시의 활발했던 경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회고. 이후 1980년대 경기가 추락했다고 봄.
-명예 영사로서의 활동: 한인이주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진출을 위한 조사가 활발해졌던 1980년대 후반, 안내자로서 역활을 이행.  교류와 이주의 개척자.각종 밀입국자들의 다각적 문제해결이나 한인민사소송에 도움.
-띠후아나 한인사회 확대를 위한 노력
-Henequen한인 후손과의 관계와 한인교회커뮤니티와의 관계: 현재 띠후아나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200여명정도. 한인후손은 통계를 낼수 없으나 약 2,000여명으로 추산. 중간자적인 관계 혹은 고리로서 매개체 역활.



띠후아나 한인교회 한글학교 현장연구











띠후아나에는 현재 한글학교가 2개가 있다. 하나는 티화나한인교회에서 하는 것, 다른하나는 한인후손회에서 하는 좀 더 오래된 '한국학교'이다.  에네껜한인후손후원재단(Henequen Korean Descendant Supporting Foundation)에서 후원하는 전자와는 달리, 교회에서 하는 수업은 정부보조와 교인들의 자원봉사 성격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교회에서 하는 한글학교를 현장연구했다.

수업은 오전 10시반에 시작, 그러나 역시 유두리있게 늦게 시작한다. 순서는 최남영목사가 진행하는  전체학습시간. 애국가와 아리랑(조용필 꿈의 아리랑) 등 한국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프로젝으로  영상을 보면서 약 30간 진행된다. 그 이후 4개의 레벨로 반이 나뉘면서 4명의 강사가 각각 수업을 맡아 중간에 십여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약 2시간정도 1시 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날 참가한 학생은 약 30여명. 2월 25일날 첫개강을 했으니 아직까지는 모두 신선한 열의를 가지고 있으리라. 매주 토요일날, 이런식으로 6월달까지 한 학기로 수업이 진행된다. 강의비는 400페소. 학생들은 전원 멕시칸이다. 연령대는 주로 10대후반에서 20대 후반이 주를 이루고 십여세즈음의 어린이도 두서넛 눈에 띈다. 남성은 5명정도로 주로 여성이 압도적이다. 수업이 시작되기전에 몇몇의 학생들에게 왜 한글을 배우게 되었냐고  속성 인터뷰를 했다.
-사례1: 26살의 네 아이의 엄마인  한 주부. 남편이 한국인이라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자 참가. 현재 일 때문에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남편은 일로 바빠 교육에 적극적이진 않은 것 같음. 아이들들로 주로 스페인어를 사용. 한글학교 참가자중에 나이가 많은 측에 속하는 학생.
-사례2: 현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여학생.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한국에서 디자인학교를 가고자 한국어를 배움.
-사례3: 띠후아나의 한국회사(전자/전기)에서 일하는 청년. 커리어를 만들기위해 공부.
-사례4,5: 단지 한국문화가 좋아서 공부를 한다는 20대 초반 여성과 17살의 남성. 주변에는 이렇게 소수문화에 관심같은 이는 많지 않다고. 그들은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음. 특히 'respeto'라는 단어로 동양문화의 키워드를 선택.  존중, 존경 혹은 경의라는 단어는 타인과인 관계,  도덕적인 자기규율이라는 점에서 관계맺기의 핵심적 단어라고 생각됨.
- 사례6,7,8: 한국인 친구가 있거나 혹은 K-pop의 영향을 받아 한글 공부 시작.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학습성취도는 낮은 것 같음.  대게가 2개월에서 1년정도 공부한 학생들인데 한글로 대화하기 무리임.
교사들은 교인과 지인, 목사사모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주로 레벨1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이 교실 저 교실을 돌아다여보았다.  한 한급에 주로 7~8명이고 많은 반은 14명까지 있어서 2명의 교사가 투입되었다. 예배당과 사무실이 동원된 학급은 자재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선생들의 열정으로 무난히 진행되었다. 몇년동안의 경험축적으로 학습교재나 교육방식자료는 잘 모여져 있는 듯싶다.  개강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주로 consonante, vocales, 단어암기 교육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문득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부수적이고, 소수문화에대한 개방성을 스스로 재확인하는 주말 한 나절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요는 학업성취도의 달성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속해서 뛰어들어 참가한다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의 삶을 변화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욕망이 있는 지점인 것이다. 동시에 사르키는 사람, 즉 선생님들을 보자. 이들은 띠후아나라는 외지에 이주해온 여성들이다. 이들이 주류사회의 멕시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통쾌한 전복이 될 수 있을것이다. 그것은 주류사회에 수동적으로 속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정체성이라고 믿고 있는 문화의 의미화를 영토화시키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Friday, March 2, 2012

Una Visita de Amistad o Entrevista ligera







한인교회에서 우연히 조영훈목사(1970.12.08)와 최혜경사모(1973.02.01)를 만나게 되었다. 간만에 정말 오랫만에 즐거운 인터뷰를 할수 있었다. 살면서 좋은 사람과 대화하는 기쁨은 그렇게 흔치않은 일이니까. 조용조용하고 유머러스한 두 내외가 맘에 든다. 긴 시간동안 들은 이야기들은 단편적이지만 꽤나 유용하다.
- 국경과 비자- 융통성
- 띠후아나/미국국경이 최초로 두절된 날. 2001.9.11
- 최혜경님의 절친 막달리나(1964)와의 친교, 토론문화속에 멕시코인의 정서.
- 최초의 삼성사택이었던  플라야스의 하얀아파트- 우리집에서 불과 1분이다.
- 띠후아나의 각 지역 도시계발이야기

사택 옆에 교회를 짓고 있는데, 1년쯤 지나면 다 지어질것 같다.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궁금.


La Asociacion Coreana de Tijuana 티후아나한인회

한인회 회의



회의 전 식사시간

al fin...


매달 한달에 한번 모이는 한인회.  실질적으로 2010년 9월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 회장은 강정부이다. 현재는 소수의 친목회 형태, 장기적으로 명칭에 걸맞는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이날 모임은 저녁 7시쯤부터 저녁식사를 시작해서 8시에 결산회의 시작.  
이날 재미있던 것은 '갈등'이다. 음식을 전부 담당해야하는 한 여성으로 부터 촉발된 의문, 왜 이렇게 자주 모여야 하는가, 또 모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목적의식이란 것이 있는가, 단순한 친목계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결론은 '천천히 시작하자'였다. 사실 행위와 의미화는 결코 그 동적인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요즘 읽는 책 '가상계'의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모임 자체가 어떤식으로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미지수 인 것이다.





2011. 9 한인회에서 주최한 한가위대축제
Corea en Tijuana Festival 2011, Mexico

Koreans Church in TIJUANA

19. FEB. 2012 11:30 AM 티화나 한인교회 예배


2001년 가을 교회활동 사진들


예배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 교인들 외 관계자

교회에서 마련한 점심이 끝나고 순번대로 설겆이를 하는 남성들


3:20 PM  한인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시작하는 멕시코인 예배

멕시코 교인 수가 별로 없다...


티화나 한인교회 전경


2월 중순에 방문한 '티화나한인교회'는 띠후아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이다. 가는 과정조차도 이 교회 집사가 데려다 주어서 수월히 도착할 수 있었다. 교인 수가 약 30여명(그날 참가한 사람기준으로, 확인요망)인 작은 교회이지만 결속력은 그 만큼 강하고, 강렬도, 밀착력도 높다.
  사회가 좁은 것은 일단은 역활분담이나, 협력에서 유리한 면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 가부장적인 역활분담에서 남성역시 그 역활이 확장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사진)
 교회는 오전에는 한인예배, 오후에는 멕시코인 예배로 나뉘어 진행하는데, 과거에는 함께했다가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 의해 분화되었다고 한다. 이 오후에 오는 멕시코예배는 시간도 거의 지켜지지않고 교인 수도 거의 없었다. 이런면에서 한인교회는  단지 개신교라는 종교모임을 이상으로 다층적인 커뮤니티의 역활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다. 띠후아나에 있는 한인들의 정보교류의 장이자, 이해, 조정관계의 교두보, 혹은 사적인 교류확장을 위한 역활까지 여러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젊은 층의 적극적인 활동이 나름 역동성과 개방성을 불러일으킨다.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모임이였다. 어떤 색깔을 지녔던지 간에, 오랜만에 방문한 하나의 커뮤니티는 그리운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 에너지가 살아있는 활달한 느낌. 그야말로 오랫동안 고립되었다가 사회로 돌아간 인류학자의 느낌인 것이다, 내가 볼 것들은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감정들을(혹은 어떤 신체를) 만들어 내는가 이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문화화/사회화하는 것인가이다. 한인교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글학교와 한인회조직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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