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e blogge es un trabajo de campo en Tijuana. soy una antropologa muy floja, lo empiezo para realizar mi creación fuerte. Voy a escribir tres idiomas, Espanol, Ingles y Coreano para que expenda a los sentidos. This blogg is a laggard anthropolosist's fieldnote to investigate in Tijuana,Mexico, I'm korean but I will try to write 3 lenguages, English, spanish and Korean for extension of the sense. 멕시코 띠후아나에서 어느 게으른 인류학도의 필드노트입니다. 언어는 영어,스페인어, 한국어 세가지로 갑니다~ 그럼 좀 부지런해지지 않겠어요?
Friday, December 21, 2012
El dia ultimo del mundo de MAYA
21일... 마야달력이 끝나는 날, 멕시코에서 밤을 맞는다. 공교롭게 한국은 애동지.
내일은 치아빠스에 자원봉사겸 여행을 가고... 몇주전부터 시작된 알레르기로 몸이 근지럽고, 생리가 시작될지 배가 슬슬 아프다.
여전히 세상은 나와 함께 잘 돌아가고 있다.
애동지에 팥죽은 먹는 것이 아니라지만, 인스턴트 단팥죽을 하나 사놨다. 팥죽과 데낄라를 섞은 깔루아를 한잔 마시고 영화를 때리면서 잠을 청해야지.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옆에는 좋은 남친이 있고. 설령 2시간뒤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만 놓고보면, 지난 몇십년간 잘살아 왔노라고 칭찬하고 싶다.
뭔가 너무 조용해서 재미가 없다. 좀더 드라마틱할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일상이 여전히 이렇게 잘 유지된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겠다. 선거 결과가 아무리 내 맘에 안들어도, 몸이 계속 근질거려도, 내 남친이 팥죽을 잘못 데펴도... 또 몇년, 몇십년뒤에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할 순간이 올테니까.
Thursday, September 27, 2012
Historia Moderna en México 멕시코 근대사 간략정리
1810
-Miguel Hidalgo y Costilla신부가 9월 16에 독립선언, 이를 '돌로레스의 절규'라고 함. 멕시코에서는 이를 이어 16일을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고, 9월 15일 밤 11시에 'viva mexico'를 외침. 이달고 신부는 민중봉기 이후 총살당함.
Miguel Hidalgo: Mural de José Clemente Orozco
1813
-Jose Maria Morelos 신부의 독립투쟁. 아카풀코 점령.
-그러나 1815년 스페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함.
Jose Maria Morelos en 50 pesos
1821
-스페인에서의 독립.
-Criollos 출신 스페인정부군 장교였던 Agustin de Iturbide가 정부군을 이탈하고 독립군에 가담, 독립이 되자 자신이 멕시코 황제로 오름. 그러나 1822년'아구스틴 1세'에서 10개월만에 사임, 이탈리아로 망명길.
-독립이후 Caudillo(토호, 지방유지)들의 지배, 1877년까지 56년간 2명의 황제, 독재자들, 대통령, 임시행정부가 통치. 새정부 평균 집권기간이 9개월일정도로 혼란.
1823
-Monroe Doctrine은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에대한 영토확장의 시작이였음.
1836
-미국과의 국경분쟁으로 Texas주 양도.
-1835년 멕시코정부가 연방주의를 폐지하자 그 반발로 텍사스주가 임시정부차림, 텍사스주독립쟁취 후 1845년 미국합병.
1846~48
-
미국 포크대통령의 남서부지역에 대한 욕망.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전쟁발발.
-1847년 미국의 윈필드 스코트장군이 멕시코 베라크루즈 시를 거쳐
수도까지 점령, 차풀테펙성에서 사관생도들의 목숨바친 항쟁.
-미국과의 전쟁에 패해, Manuel Peña 정부가 미국과 Guadalupe Hidalgo조약을 체결하여 보상금 1500만 달러를 받고 캘리포니아, 네바다, Uhah, Arizona, New Mexico, Wyoming, Colrado 주 등 249만킬로제곱미터를 미국에 양도, 이는 현 멕시코영토보다 큰 면적임.
1855
-Benito Juárez 대통령 집권. 최초의 인디헤나 출신 대통령. 자유개혁 단행. 카톨릭소유 재산 몰수.
1857
-새헌법제정
1858
- 펠릭스 술로아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간의
내전시작
1860
-12월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으나 내전으로 인해 국가재정 고갈
1861
-외채상환 및 이자지불중단선언
1862
-외채상환국이였던 프랑스,영국, 스페인 3연합군이 베라크루스에 상륙. 1863년 미국 견제와 라틴장벽을 쌓고싶었던 프랑스와 멕시코보수주의자들이 막시말리노황제추대-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내전 발생. 프랑스 개입.
-자유주의자란: 유럽의 정치과정, 기술발전, 지적자유의 수호. 교회와 국가 분리, 의무교육 실시, 투표권 확대, 무역과 이민 장려, 사회개혁, 연방주의 등을 주장. 19세기 후반부터 우세. 1850년부터 1900년 사이 대부분 국가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섬.
-보수주의란: 전통적 가치관, 교회특권 옹호, 중앙집권주의자, 자유무역, 외국자본 유입 반대 등을 주장한 정치 세력.
1864
-프랑스는 멕시코 보수파의 지지를 받으며 합스부르크 왕국의 오스트리아 왕자 Fernando Maximiliano룰 황제로 추대, 전제군주국이 됨.
1865~1867
-프랑스 상대로 제 2의 독립전쟁
1867
-미국의 항의로 프랑스군 철수한 후 황제는 체포후 처형
-Benito Juárez가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 됨.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혼란을 겪다 1972년 병사.
1876
-Porfirio Díaz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 35년간 독재정권 유지. 이때 경제개발이 많이 추진 됨.
1877
-철도연장 578km, 전신선이 증가.
1898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 패함으로서 패권이 끝남
1910
-Revolucion 시작.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
-1911년 5월 Díaz는 프랑스로 망명. 이후 약 20년간 내란으로 정세 불안.
1929
-북부지방 개혁주의자들이 정권 장악.
-국민혁명당(Pártido Nacional Revolrucionario) 창당. 1946년에 제도혁명당(Pártido Revolrucionario Institucional, PRI)으로 명칭 변경
1934
-Lazaro Cardenas 대통령은 농지 개혁 및 노동자 권익 증진.
-석유와 철도 국유화. 이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
-오브레곤의 혁명 완수에 대한 의지는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 장관에 발탁해서 교육혁명을 실천한 것에 잘 나타남, 원주민을 비롯한 전국민의 기초교육제공, 벽화운동
1942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지원.
-상품 수출 증가. 산업 확대. 고용증대.
1946~1952
-Miguel Aleman Valdes 대통령 집권 기간.
-외자 도입 적극 추진. 본격적인 공업화 정책 추진.
1968
-10월 2일 틀라텔롤코광장 학살사건
1976~1982
-Jose López Portillo 집권 기간.
-주요 석유 생산국으로 부각. 그러나 석유만 믿고 외채를 마구 들여옴.
1986
-국제원유 가격 하락. 외화수입 감소. 경제난.
1988~1994
-Carlos Sarinas de Gortari 대통령 집권 기간.
-과감한 시장 개방 정책 추진, 민영화, 석유 노조 약화.
1994
-NAFTA 발효: 미국, 캐나다와의 북미 자유 무역 협정.
-Chiapaz 주 Zapatista 원주민, 농민들의 무장 봉기.
-여당 대통령후보 암살 사건.
-12월 외환 위기로 IMF가 지원.
1994~2000
-Ernesto Zedillo Ponce de Leon 대통령 취임.
2000
-7월 총선거에서 제1야당인 국민행동당(Partido Accion Nacional: PAN)의 Vicente Fox Quesada가 대통령 당선. 71년만의 정권 교체.
2006
-6월 2일 PAN의 Felipe Calderón Hinojosa 대통령 당선
2012
7월 1일 선거로 PRI-PVEM의 Enrique Peña Nieto가 대통령 당선
Wednesday, August 1, 2012
이번주 영화테마 "여성"
휴가를 갔다와서 방콕을 하며 영화를 몰아보고 있는 중.
테마는 여성이다.
1. 투스카니의 태양: 깨끗한 느낌. 나만의 숙소를 짓고 싶어졌다
2. 일본곤충기: 기대보다 덜 충격적. 그래도 역시 고전영화의 묘미는 서사
3. 로라의 침묵: 엔딩이 된 후 몇 분만에 눈물이 주르륵
4. 동경이야기: 조금 외도를 해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를 봤다. 분명 섬세한 미장센 연출은 아름답지만, 그렇게 명작인가 의문이 드는 작품. 그럼에도 몰입도는 강렬했다.
5. 진링의 13소녀들: 오랜만에 장예모의 최신작 감상. 드라마의 대가답게 재미는 있지만, 강렬하지는 않음.
6. 헝거게임: 주인공이 17세 아르테미스의 화신같은 소녀. 최근 서바이벌 티비쇼를 풍자하듯이 재기발랄하게 그려진 전형적인 헐리우드영화, 아직 시리즈가 덜 끝났다.
7. 부르조와의 은밀한 매력: 루이스 브뉘엘 영화는 몰입도가 항상 강렬하다. 초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현실적인 영화.
8. 연연풍진: 허우샤오시엔의 초기작중 하나, 오히려 나중 작품보다 깨끗한 작품.
9. 히스테리아: 19세기 여성론을 재미있게 풀어놈.
10. 닥터지바고: 역시 서사는 고전영화
11. 아비정전: 다시보는 왕가위의 명작. 역시 가오잡기 달인.
12. 토리노의 말: 대단한 영화다. 영화를 찍는 것과 감상하는 방식 둘다를 혁명하게 만든다.
13. 송곳니: 멕시코거장 Arturo Ripstein 의 '순수의 성'(1973)의 오마쥬인듯, 나름 좋다.
14. 백인의 것: 아직도 백인의 영화
15. 버팔로 66: 잔잔한 판타지
16. 페린느 이야기: 일본 세계명작시리즈 애니중 단연 최고, 페린느의 로드무비
17. 루르드: 기적조차 세속적인 것.
18. 하랸리본: 역시 미카엘 하네케감독! 근래 본 영화중 가장 내취향.
이미 여성이라는 테마와 상관없이 새로운 목록이 열거되버렸다...
Friday, June 22, 2012
멕시코시는 비...
2주째 멕시코시티에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덕분에 기분이 멜랑꼴리해서 글을 써본다. 태풍의 영향이라지만 왠지 지진 전조같다.
시험에 떨어지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가 사는 떼삐또지역에 대해 인류학책을 읽고 있고, 윤호 생일파티를 준비중이다.
시험에 떨어지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가 사는 떼삐또지역에 대해 인류학책을 읽고 있고, 윤호 생일파티를 준비중이다.
Saturday, April 21, 2012
Carlos 생일파티
2009년 멕시코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던 내 친구이자 전 집주인 산드라와 까를로스...
2009년에도 까를로스 생일파티를 했었는제 3년 만에 다시 방문하여 생일파티를 하였다.
여전히 산드라는 맛난 음식을 차려주고, 음악도 함께...
내가 잤던 방, 내가 항상 담배피던 그자리에서 3년만에 다시 서보니 시간은 빨리가지만 사람과 풍경은 그대로 였다. 그리고 산드라의 음식맛도... 윤호는 두 그릇이나 먹었다. 윤호랑 같이 산드라집을 방문하니 더욱 가족같은 느낌이었다.
Wednesday, April 11, 2012
Saturday, April 7, 2012
Sábado de Gloria
3월 19일 Tijuana에서 출발해서 버스로 이틀동안 거쳐 드디어 D.F 에 도착했다.
그동안 새아파트를 구하느라 우암원서를 내느라, 새 집을 채울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사느라 정신없이 바쁜 몇주를 보냈다. 그리고 어느새 훌쩍 다가온 Semana Santa.
새로 구한 아파트는 무척 아름답지만, 지역이 Morelos라는 떼삐또 바로 근처이다. 그래서 항상 긴장하며 다닐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은행에서 생활비를 꺼내오면서 긴장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갑작스런 물세례를 받았다. 바로 영광의 토요일, 4월 7일이기 때문이다.
웬지 물세례를 맞는 순간, 이곳 주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거친듯 했다. 그래서 나로서도 영광이다. 그간 초국가적 이주민 연구를 하다가 상당히 폐쇄적인 토박이들의 장소인 멕시코 한 동네에 들어왔다. 어쩌면 이로서 드디어 내 연구지와 다른 곳을 적나라하게 비교연구할 수 있으리라.
Monday, March 5, 2012
El Santo Juan Soldado en Tijuana
Juan Castillo Morales, ( - 1938) known by many as Juan Soldado (Juan the Soldier), was a convicted rapist and murderer who later became a folk saint to many in northwestern Mexico and in the southwestern United States. A private in the Mexican army, Castillo was executed on February 17, 1938 for the rape and murder of Olga Camacho Martínez, an eight-year-old girl from Tijuana, Baja California. His adherents believe that he was falsely accused of the crime and have appealed to his spirit for help in matters of health, criminal problems, family matters, crossing the U.S.-Mexico border and other challenges of daily life.
Shortly after his execution the story began circulating that he was innocent and had been framed by a superior officer who was guilty of the crime. Residents began reporting strange events associated with Juan Soldado's gravesite shortly after his death, including blood seeping from his grave and ghostly voices. Others began leaving stones at his tomb, attributing miraculous occurrences to them.
In the old Puerta Blanca cemetery there are now small chapels dedicated to Juan Soldado. The first one is the edge of the pantheon where he died. The second chapel is for all to enter and is where it says he is buried; both chapels are regularly visited and prayed at by people who have problems crossing the border into the United States or who are involved in the trafficking of people in the borderland. Devotees have also claimed that he has interceded for them in other areas, such as health and family problems.
Other shrines to Juan Soldado can be found elsewhere throughout the region, while votive candles, ex voto cards and other religious items devoted to him are sold throughout northwestern Mexico and the areas of California and Arizona where immigrants passing through the region have established communities. Similar cults have arisen around the gravesites of other victims of injustice who met a violent death and who are believed to have the power to intercede on behalf of those who pray for them.
Juan Soldado's cult reflects, in some ways, the unsettled community that Tijuana was and is. The Catholic Church had no well-established local saints in the Tijuana region and was itself compromised in the eyes of many by its association with the powerful interests against whom the Mexican Revolution had been fought. Juan Soldado, a humble, nearly anonymous emigrant from the countryside who was allegedly wrongly accused by the authorities, was a fitting symbol of the upheavals that the people of that era and region confront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aturday, March 3, 2012
한인회장 인터뷰
띠후아나 이주 한인 2세대이자, 대한민국정부하 이민 1세대.
Playas de Tijuana의 StarBucks에서 약 한시간 반 정도의 첫인터뷰.
-인터뷰 내용
-성장과 가족: 1944년 8월 23일 만주 자모수에서 출생. 부모님은 함경북도 북청의 상인출신으로 4형제중 셋째로 태어남.
-한 개인으로서의 이주정착 과정: 해방후 북한으로 왔다가 45년 서울로 남하,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가 유년시절보냄. 초등학교이후 서울로 다시 상경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에 입학. 1972년 26세때 멕시코친구의 추천으로 멕시코로 유학, San Luis Ptosi에서 중남미지역연구로 수학. 6개월후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UNAM에서 유학생활하며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1974년 띠후아나로 취업이주. 당시 재미교포였던 송순식(1920)의 사업을 도와 공장관리인으로 취업. 1970년대 띠후아나는 자유무역지대로서 관세의 혜택이 있었음. 당시 송씨도 이러한 국경지대의 잇점을 이용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포목수출업(태권도복원단)을 함. 그곳에서 1년간 일하다 1975년 결혼하여 친구와 함께 가전제품소매상사업을 함. 70년대 중반 멕시코경제는 가히 버블경제라 일컬을 만큼 경기가 좋았음. 특히 통관의 잇점을 활용한 경제활동 활발. 밀수입(띠후아나-멕시코시티)그 당시의 활발했던 경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회고. 이후 1980년대 경기가 추락했다고 봄.
-명예 영사로서의 활동: 한인이주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진출을 위한 조사가 활발해졌던 1980년대 후반, 안내자로서 역활을 이행. 교류와 이주의 개척자.각종 밀입국자들의 다각적 문제해결이나 한인민사소송에 도움.
-띠후아나 한인사회 확대를 위한 노력
-Henequen한인 후손과의 관계와 한인교회커뮤니티와의 관계: 현재 띠후아나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200여명정도. 한인후손은 통계를 낼수 없으나 약 2,000여명으로 추산. 중간자적인 관계 혹은 고리로서 매개체 역활.
띠후아나 한인교회 한글학교 현장연구
띠후아나에는 현재 한글학교가 2개가 있다. 하나는 티화나한인교회에서 하는 것, 다른하나는 한인후손회에서 하는 좀 더 오래된 '한국학교'이다. 에네껜한인후손후원재단(Henequen Korean Descendant Supporting Foundation)에서 후원하는 전자와는 달리, 교회에서 하는 수업은 정부보조와 교인들의 자원봉사 성격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교회에서 하는 한글학교를 현장연구했다.
수업은 오전 10시반에 시작, 그러나 역시 유두리있게 늦게 시작한다. 순서는 최남영목사가 진행하는 전체학습시간. 애국가와 아리랑(조용필 꿈의 아리랑) 등 한국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프로젝으로 영상을 보면서 약 30간 진행된다. 그 이후 4개의 레벨로 반이 나뉘면서 4명의 강사가 각각 수업을 맡아 중간에 십여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약 2시간정도 1시 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날 참가한 학생은 약 30여명. 2월 25일날 첫개강을 했으니 아직까지는 모두 신선한 열의를 가지고 있으리라. 매주 토요일날, 이런식으로 6월달까지 한 학기로 수업이 진행된다. 강의비는 400페소. 학생들은 전원 멕시칸이다. 연령대는 주로 10대후반에서 20대 후반이 주를 이루고 십여세즈음의 어린이도 두서넛 눈에 띈다. 남성은 5명정도로 주로 여성이 압도적이다. 수업이 시작되기전에 몇몇의 학생들에게 왜 한글을 배우게 되었냐고 속성 인터뷰를 했다.
-사례1: 26살의 네 아이의 엄마인 한 주부. 남편이 한국인이라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자 참가. 현재 일 때문에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남편은 일로 바빠 교육에 적극적이진 않은 것 같음. 아이들들로 주로 스페인어를 사용. 한글학교 참가자중에 나이가 많은 측에 속하는 학생.
-사례2: 현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여학생.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한국에서 디자인학교를 가고자 한국어를 배움.
-사례3: 띠후아나의 한국회사(전자/전기)에서 일하는 청년. 커리어를 만들기위해 공부.
-사례4,5: 단지 한국문화가 좋아서 공부를 한다는 20대 초반 여성과 17살의 남성. 주변에는 이렇게 소수문화에 관심같은 이는 많지 않다고. 그들은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음. 특히 'respeto'라는 단어로 동양문화의 키워드를 선택. 존중, 존경 혹은 경의라는 단어는 타인과인 관계, 도덕적인 자기규율이라는 점에서 관계맺기의 핵심적 단어라고 생각됨.
- 사례6,7,8: 한국인 친구가 있거나 혹은 K-pop의 영향을 받아 한글 공부 시작.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학습성취도는 낮은 것 같음. 대게가 2개월에서 1년정도 공부한 학생들인데 한글로 대화하기 무리임.
교사들은 교인과 지인, 목사사모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주로 레벨1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이 교실 저 교실을 돌아다여보았다. 한 한급에 주로 7~8명이고 많은 반은 14명까지 있어서 2명의 교사가 투입되었다. 예배당과 사무실이 동원된 학급은 자재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선생들의 열정으로 무난히 진행되었다. 몇년동안의 경험축적으로 학습교재나 교육방식자료는 잘 모여져 있는 듯싶다. 개강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주로 consonante, vocales, 단어암기 교육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문득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부수적이고, 소수문화에대한 개방성을 스스로 재확인하는 주말 한 나절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요는 학업성취도의 달성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속해서 뛰어들어 참가한다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의 삶을 변화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욕망이 있는 지점인 것이다. 동시에 사르키는 사람, 즉 선생님들을 보자. 이들은 띠후아나라는 외지에 이주해온 여성들이다. 이들이 주류사회의 멕시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통쾌한 전복이 될 수 있을것이다. 그것은 주류사회에 수동적으로 속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정체성이라고 믿고 있는 문화의 의미화를 영토화시키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Friday, March 2, 2012
Una Visita de Amistad o Entrevista ligera
한인교회에서 우연히 조영훈목사(1970.12.08)와 최혜경사모(1973.02.01)를 만나게 되었다. 간만에 정말 오랫만에 즐거운 인터뷰를 할수 있었다. 살면서 좋은 사람과 대화하는 기쁨은 그렇게 흔치않은 일이니까. 조용조용하고 유머러스한 두 내외가 맘에 든다. 긴 시간동안 들은 이야기들은 단편적이지만 꽤나 유용하다.
- 국경과 비자- 융통성
- 띠후아나/미국국경이 최초로 두절된 날. 2001.9.11
- 최혜경님의 절친 막달리나(1964)와의 친교, 토론문화속에 멕시코인의 정서.
- 최초의 삼성사택이었던 플라야스의 하얀아파트- 우리집에서 불과 1분이다.
- 띠후아나의 각 지역 도시계발이야기
사택 옆에 교회를 짓고 있는데, 1년쯤 지나면 다 지어질것 같다.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궁금.
La Asociacion Coreana de Tijuana 티후아나한인회
한인회 회의
회의 전 식사시간
al fin...
매달 한달에 한번 모이는 한인회. 실질적으로 2010년 9월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 회장은 강정부이다. 현재는 소수의 친목회 형태, 장기적으로 명칭에 걸맞는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이날 모임은 저녁 7시쯤부터 저녁식사를 시작해서 8시에 결산회의 시작.
이날 재미있던 것은 '갈등'이다. 음식을 전부 담당해야하는 한 여성으로 부터 촉발된 의문, 왜 이렇게 자주 모여야 하는가, 또 모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목적의식이란 것이 있는가, 단순한 친목계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결론은 '천천히 시작하자'였다. 사실 행위와 의미화는 결코 그 동적인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요즘 읽는 책 '가상계'의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모임 자체가 어떤식으로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미지수 인 것이다.
2011. 9 한인회에서 주최한 한가위대축제
Corea en Tijuana Festival 2011, Mexico
Koreans Church in TIJUANA
19. FEB. 2012 11:30 AM 티화나 한인교회 예배
2001년 가을 교회활동 사진들
예배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 교인들 외 관계자
교회에서 마련한 점심이 끝나고 순번대로 설겆이를 하는 남성들
3:20 PM 한인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시작하는 멕시코인 예배
멕시코 교인 수가 별로 없다...
티화나 한인교회 전경
2월 중순에 방문한 '티화나한인교회'는 띠후아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이다. 가는 과정조차도 이 교회 집사가 데려다 주어서 수월히 도착할 수 있었다. 교인 수가 약 30여명(그날 참가한 사람기준으로, 확인요망)인 작은 교회이지만 결속력은 그 만큼 강하고, 강렬도, 밀착력도 높다.
사회가 좁은 것은 일단은 역활분담이나, 협력에서 유리한 면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 가부장적인 역활분담에서 남성역시 그 역활이 확장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사진)
교회는 오전에는 한인예배, 오후에는 멕시코인 예배로 나뉘어 진행하는데, 과거에는 함께했다가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 의해 분화되었다고 한다. 이 오후에 오는 멕시코예배는 시간도 거의 지켜지지않고 교인 수도 거의 없었다. 이런면에서 한인교회는 단지 개신교라는 종교모임을 이상으로 다층적인 커뮤니티의 역활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다. 띠후아나에 있는 한인들의 정보교류의 장이자, 이해, 조정관계의 교두보, 혹은 사적인 교류확장을 위한 역활까지 여러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젊은 층의 적극적인 활동이 나름 역동성과 개방성을 불러일으킨다.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모임이였다. 어떤 색깔을 지녔던지 간에, 오랜만에 방문한 하나의 커뮤니티는 그리운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 에너지가 살아있는 활달한 느낌. 그야말로 오랫동안 고립되었다가 사회로 돌아간 인류학자의 느낌인 것이다, 내가 볼 것들은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감정들을(혹은 어떤 신체를) 만들어 내는가 이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문화화/사회화하는 것인가이다. 한인교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글학교와 한인회조직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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